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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em

쉽게 쓰여진 시 - 윤동주 (1948)




쉽게 쓰여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아마도 윤동주의 시는 어렸을 적부터 접하면서,

정말 한글을 아름답게 노래한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윤동주의 시로 '서시'를 꼽을 테지만,

나는 이 시를 제일 좋아한다.


가끔씩 찾아보는 시인데,


외로운 타향생활 중

남의 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며 자기성찰을 하며 쉽게 쓰여지는 시를 탓하는,

그러나 담담하게 다시금 마음을 부여잡는

시인의 다짐이


이따금 가슴을 울리기도 하여,

지금의 나 또한 다시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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