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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범의 제길공명] “귀가 없네? 너 지휘자구나!”

좋은 귀를 가진 유능한 상임지휘자가 단원들에게 후한 표를 얻기는 사실상 매우 힘들다. 사진은 최근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상영된 앙헬 에스테반 감독과 엘레나 고아텔리 감독의 다큐멘터리 <지휘자를 위한 1분>의 한 장면. 전세계 130여명의 젊은이들이 명지휘자 경쟁을 펼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구자범의 제길공명
(2) 모자란 지도자를 요청하는 사회

▶ 구자범 한국의 대학에서 술과 철학을, 독일의 대학에서 커피와 음악을 배웠다. 15년간 독일의 여러 오페라극장에서 지휘를 하다가, 사람 냄새 그리워 한국에 돌아와 교향악단을 맡았으나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음

악계를 떠났다. 지금은 바닷가에 홀로 살면서 뜻있는 좋은 사람들과 술 마실 궁리를 한다. <한겨레> 토요판에 격주로 연재하는 ‘제길공명’(諸吉共鳴)은 ‘모두가 좋은, 함께하는 떨림’을 뜻하는 필자의 신조어다.

토끼와 뱀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동굴 안에서 우연히 부딪치고는 서로 외쳤다. “누구냐!” 뱀이 토끼를 만져보면서 “음… 털이 복슬복슬 보드랍고, 따뜻한데, 귀가 기네. 너, 토끼구나”라고 말하자, 이번엔 토끼가 뱀을 만져보며 말했다. “음… 털도 없이 징그럽고, 차갑고… 어? 근데 귀가 없네? 너 지휘자구나!”

세상에는 세 종류의 지휘자가 있다고 한다. 절대음감이 있는 지휘자와 절대음감이 없는 지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 ‘음감’이 없는 지휘자.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어릴 때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아무리 ‘보이는 대로’ 그리라고 해도 나는 잘 그릴 수가 없었다. 머리가 좀 크고 나서 ‘보이는 만큼 아는 게 아니라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이해한 뒤에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단지 손재주가 없어서 화가처럼 못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화가처럼 보지 못하는 것임을.

한편, 누구나 글자를 읽을 줄 알면 받아쓰기로 글을 적을 수 있듯이, 악보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음악을 듣고 다 악보로 받아쓸 수 있는 줄 알았다. 나중에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이 되어서야 절대음감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는 나는 꽤 충격을 받았었다.

절대음감이란 일종의 병이기 때문에, 고백하자면 세상의 소리가 ‘음정’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듣는다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화가들이 나의 그림을 본다면 ‘도대체 너에겐 이게 어떤 식으로 보인다는 거냐?’라고 궁금해할 것이 틀림없듯이.

절~대 ‘음감’이 없는 지휘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걸 아시는지 
이들은 잘 듣는 척 사기를 친다 
그런 이들을 원하는 단원들이 
독일 오케스트라에 있다면 믿을까

연주가 조금만 틀려도 지적할 
‘좋은 귀’를 가진 상임지휘자가 
단원들로선 부담스러운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안 할 사람을 
지도자로 원하는 건 당연한가

하겐 극장의 지휘자 선발 때 생긴 일

절대음감이란 한마디로, 음을 들려주며 이름을 세뇌하면 나중에도 그 음을 들을 때마다 저절로 그 이름이 떠오르게 되는 병적인 잠재기억력이다. 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실험한 바로는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음악을 들을 때 그 뇌를 관찰해보니, 일반인처럼 우뇌의 감성 영역만 활성화되는 게 아니라 좌뇌의 언어 영역이 동시에 활성화된다고 한다.

어릴 때 서양악기를 접한 음악가 중엔 이 병을 앓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이들은 악기를 짚은 손가락에서 예상과 다른 음정의 이름이 들리면 매우 당황하기에, 몇백 년 전에 설치되어 기준음고가 낮은 파이프오르간을 비롯한 원전(Authentic) 악기로는 연주도 못 하고, 다른 가수 음역에 맞추어 조율해놓은 기타를 연주할 수도 없다. 또 오페라나 뮤지컬을 들을 때도 매번 오케스트라의 수많은 음정이 하나하나 좌뇌의 언어 영역을 건드리기 때문에 일반인에 비해 노래 가사 집중에 상대적으로 약하다. 마치 음성다중채널 수십 개를 동시에 틀어놓고 듣는다면 그중 가사를 담당한 한 채널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다. 가장 끔찍한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어릴 때 한번 서양음계에 의해 절대음감이란 병에 걸리고 나면, 나중에 국악을 들을 때도 우리 고유의 음정으로 듣지 못하고 평생 서양음계의 어떤 ‘사이’ 음정으로 인식하는 치명적인 불구가 된다는 점이다.

음악을 하는 데 절대(!)로 절대음감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좋은’ 음감이 필요할 뿐이다. 엄청나게 많은 수로 분류된 립스틱의 빨간색을 한번 척 보고 그 이름을 맞히는 사람이 반드시 연인의 입술을 더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듯, 절대음감을 가진 감상자가 음악을 더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또 손에 쥔 밥알 개수를 맞힐 수 있는 사람이 초밥을 만든다고 반드시 훌륭한 요리사라고 할 수는 없듯이, 절대음감을 가진 연주자가 음악을 더 맛있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음악성과 근본적으로는 상관도 없는 절대음감 이야기가 자꾸 지휘자를 두고 따라다니는 것일까? 문제는 동굴 속 토끼의 일갈처럼 절~대 ‘음감’이 없는 지휘자가 생각보다 꽤 많다는 데 있다.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그리지도 못하는 내가 캔버스에 물감을 휙 뿌리고는 현대미술 작품이라고 우긴다면 사기이듯이, 이런 지휘자들은 도대체 뭘 어떻게 듣는지 모르지만, 하여간에 제대로 듣지 못하면서 잘 듣는 척하는 사기를 친다. 그러니 절대음감이란 불편한 병을 가진 사람이 차라리 낫다고 보는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음악적으로 훌륭한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그 병의 특성상 적어도 절~대 ‘음감’이 없는 사람처럼 사기를 치지는 못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즉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좋은 음악성을 가졌을 확률은 어느 정도 있지만, 절~대 ‘음감’이 없는 사람이 좋은 음악성을 가졌을 확률은 너무 낮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절~대 ‘음감’이 없는 지휘자를 원하는 단원들이 독일 오케스트라에 있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독일의 극장은 거의 매일 공연을 하므로 여러 명의 상임지휘자를 둔다. 내가 있던 하겐 극장에서 동료 지휘자 자리가 하나 비어 새 지휘자를 선발할 때, 마침 바로 한 달 전에 새롭게 부임한 동독 연출가 출신의 극장장은 서독 성악가 출신인 전 극장장과는 달리 야심차게도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한 지휘자는 절대로 뽑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때 후보 중에 베를린에서 온 아주 ‘좋은’ 음감을 지닌 지휘자가 있었는데, 그는 관악기의 미세한 음정을 악기별로 하나하나 조율해가며 (지휘자에게 평균율로 세뇌된 절대음감이 아닌 그저 ‘좋은’ 음감이 있을 경우 이런 조율을 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 관악기들은 특성상 화음을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는 자신의 악보로는 같은 음정일지라도 총보의 화음 속 위치에 따라 그때그때 소리를 미세하게 다르게 내야 한다. 그래서 좋은 오케스트라일수록 관악기 단원들은 자신이 내는 음이 현재 화음에서 근음인지 3음인지 등을 염두에 두고 끊임없이 조절한다) 우리 극장 오케스트라의 수준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기가 막힌 협화음을 이끌어내는 멋진 리허설을 했다. 지켜보던 나를 비롯한 다른 모든 지휘자들이 ‘브라보’를 외쳤고, 저런 좋은 지휘자가 동료가 되어 함께 일할 수 있다는 희망에 행복했다.

‘틀린 소리’ 났을 때 쳐다보지 않는 훈련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그는 투표한 80명이 넘는 단원들로부터 단 넉 장의 찬성표만 얻었다!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에게 찬성을 표시할 수 있게 한 복수투표 방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유일하게 과반수 찬성표를 받은 사람은 놀랍게도 절~대 ‘음감’이 없기로 유명한 지휘자였는데 “이 부분은 구름에서 해가 살짝 나오는 느낌으로 해주세요”라고 말한 뒤 그다음은 소리가 얼마나 찌그러지든 상관없이 한 번도 끊지 않고 연주하며 마치 득도한 성자인 양 그저 웃기만 하던 사람이었다. 새로 온 극장장을 비롯한 우리 지휘자들은 이 투표 결과에 너무 당황해서 한참의 회의 끝에 아무도 선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이후 오디션부터는 오케스트라 단원에게 투표권은 주되 과반수라는 조건은 빼고 그저 심사에 참조만 하기로 했다.

음감이 좋은 사람이 ‘객원’지휘자로 와서 제대로 리허설을 하고 연주 뒤 ‘바이, 짜이젠~’ 하고 가면 단원들은 신선함을 느끼고 매우 행복해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좋은 귀를 가진 사람이 ‘상임’지휘자로 온다고 하면 좀 시큰둥해하는 사람도 있고, 음악‘감독’으로 온다고 하면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다. 사실 독일은 전국의 오케스트라가 강력한 하나의 산별노조로 이루어져 있고, 엄밀한 오디션 뒤 엄격한 수습기간이 지나면 종신단원이 되므로, 비정규 계약직인 상임지휘자나 음악감독에겐 단원 선발권은 있어도 평가권이나 해임권은 없다. 그런데도 그 지휘자가 좋은 귀를 가졌다면 자기 연주가 아주 조금 ‘틀린’ 것도 다 듣고 지적할 테니 매번 긴장해야 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사실 독일의 지휘과에서는 실수로 ‘틀린’ 소리가 났을 때 곧바로 그 단원을 쳐다보지 않는 훈련을 한다. 그 단원은 이미 틀린 것을 스스로 알고 있을뿐더러, 쳐다보면 당황해서 연주하기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리면 그쪽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즉각적인 반응을 하게 마련이라서, 이것을 무디게 만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니 이런 훈련을 한 지휘자가 리허설 하는 것은 보통 연주의 ‘틀림’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전체 음악의 조화를 위해 연주의 ‘다름’을 제안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년 전엔 스칼라 극장의 지휘자 리카르도 무티가 단 두 표를 얻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어떤 상임지휘자도 단원들에게 후한 표를 얻기는 사실상 매우 힘들다. 100여명의 사원이 있는 평범한 회사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사원 중 몇 명이나 매일 아침 사장을 직접 오랜 시간 대면할까? 어쩌면 대부분은 사장을 만나는 일도 별로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일 어떤 회사의 일상 업무가 사원 100명 모두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상태에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온종일 매의 눈으로 바라보며 끊임없이 이것저것 요구하는 사장의 잔소리대로 똑같이 따라 해야 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끔찍할까?

모든 프로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가엽게도 바로 이런 끔찍한 일을 본업무로 삼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지휘자가 제아무리 실력이 있고 괜찮은 사람일지라도 그를 마냥 좋아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한국처럼 상임지휘자가 단원 평가권까지 갖고 있다면 얼마나 부담스럽고 짜증스러울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귀 없는 지휘자에게는 좀 요령을 부리며 편하게 지낼 심산으로, 새로 지휘자가 부임하면 그의 귀를 시험해보겠다고 일부러 틀린 소리를 냈다가 걸려서 된통 혼나는 단원까지 있다.

이 단원들이 실제로 연주 실력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자기가 독주회를 한다면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여서 열심히 연습하고, 멋진 기량으로 연주하는 훌륭한 음악가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오케스트라에서는 틀림이건 다름이건 그런 게 중요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불편한 것이 싫을 뿐이다. 문제는 그러다 보면 안타깝게도 정말로 관심 가져야 할 다른 중요한 것조차 귀찮아진다는 데 있다.

공정한 오디션과 출근 사이에서

독일의 모든 오케스트라에서는 새 단원을 뽑는 오디션에 모든 단원이 참가해서 투표를 하고, 거기서 뽑힌 단원과 함께 연주한 지 2년이 지나면 또 전체투표를 해서 종신단원으로 함께 지낼 것인지를 다시 결정한다. 그런데 그 종신단원(사실은 수습기간 지나면 누구나 종신단원이니 아예 이런 말 자체가 없지만)도 다른 좋은 오케스트라에 자리가 날 때마다 자유롭게 오디션을 보러 가기도 한다. 또 강력한 노조에 의해 평생직장이 보장되지만, 좋은 오케스트라일수록 연주회에서 몇 번 연속으로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 본인 스스로 알아서 그만두는 암묵적 전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나는 한국에 와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독일처럼 노조를 만들 것을 권고했고, 신입단원 오디션 때 모든 단원이 와서 참관하고 복수투표 방식으로 의견을 내달라고 했다. 특히 자기 파트의 단원을 뽑는 경우 해당 파트 단원은 의무적으로 참관해서 서면으로 의견을 내주길 요청했다. 그런데 어느 한 오케스트라에서는 이러한 공정한 오디션이 되도록 감시하고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고 해서 투표를 해보았더니, 놀랍게도 정말 거부 의사가 과반수였다.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은 신입단원 오디션을 하는 날이 출근하지 않는 날이었는데, 이제부터 그날도 출근을 해야 하는 것이 귀찮다는 것이었다.

구자범.

나의 편안함이 모든 기준이 되는 사회에 산다. 그래서 ‘차라리’ 귀 없는 지휘자를 요청하듯, 그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지도자를 선택한다. 진시황이 죽은 뒤 좀 모자란 아들 호해를 황제로 옹립한 환관 조고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누렸다는데, 조고와 그의 추종자 입장에선 호해가 모자라면 모자랄수록 더 편하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런 편안함의 추구는 ‘아테네의 등에’를 자처하며 귀찮은 소리를 하는 소크라테스나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며 불편함을 종용하는 예수에게 민주주의의 다수결이란 이름으로 아예 죽음을 선고하기까지 한다.

내가 가진 것을 잘 유지해줄 사람, 나에게만은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을 사람, 나만은 더 벌 수 있게 봐주는 사람을 지도자로 원하는 것이 민주주의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확신에 차 말하는 사람들 앞에서, ‘민주’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할 말을 잃고 두 팔을 벌릴 뿐이다.

구자범


http://www.hani.co.kr/arti/SERIES/619/6523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