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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범의 제길공명] 보통 빠르게, 가장 빠르게, 더 빠르게

음악이란 다른 차원의 시간을 여행하는 예술이기에, 서양 고전음악에서는 그 한정된 시간을 기본적으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관해 ‘템포 지시어’로 곡의 첫머리에 써놓았다. 2010년 3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체코 야나체크 오케스트라가 공연하는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구자범의 제길공명
(3) 템포 모데라토

▶ 구자범 한국의 대학에서 술과 철학을, 독일의 대학에서 커피와 음악을 배웠다. 15년간 독일의 여러 오페라극장에서 지휘를 하다가, 사람 냄새 그리워 한국에 돌아와 교향악단을 맡았으나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음악계를 떠났다. 지금은 바닷가에 홀로 살면서 뜻있는 좋은 사람들과 술 마실 궁리를 한다. <한겨레> 토요판에격주로 연재하는 ‘제길공명’(諸吉共鳴)은 ‘모두가 좋은, 함께하는 떨림’을 뜻하는 필자의 신조어다.

독일 만하임 음대 지휘과 수업시간에 어떤 학생이 지휘를 하다가 갑자기 멈추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템포 없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템포란 말은 하도 여러 의미로 쓰이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연주하던 학생들은 혹시 악보에 템포 지시가 적혀 있지 않은가를 묻는 것인지, 자기가 지휘하는 템포에 맞추지 못했다고 불평하는 건지, 아니면 템포를 못 잡겠으니 혹시 메트로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 것인지, 도통 맥락을 잡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잠시 고개를 젓고는 급히 단에서 내려와 자신의 가방을 뒤지더니, 독일에서는 고유 상표명이 일반명사화 되어 쓰이는 일회용 티슈인 그 유명한 ‘템포’를 꺼내 흥~ 하고 코를 푸는 것이 아닌가.

원래 템포(tempo)는 시간(time)이란 뜻의 이탈리아 말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철학자나 물리학자에게도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그 답을 하려면 물음의 차원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10의 -43승 초를 다루는 현대 물리학으로 우주의 시작을 기술한 와인버그의 <최초의 3분>이란 책의 3분과 우리가 자취방에서 뚝딱 해먹는 ‘3분 짜장’의 3분은 그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학에서는 물리적 시간이나 심리적 시간과 구분해서 ‘음악적 시간’을 다른 차원의 시간으로 보는 학자들이 꽤 있다.

템포에 대해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반 메트로놈의 전형. 모든 템포 지시어는 임의로 적은 것일 뿐 순서나 숫자와 전혀 상관없다. 예를 들어 숫자 120 옆에 보이는 ‘아니마토’(Animato)는 ‘숨(Anima)’에서 나온 말로 ‘숨 가쁘게’ 정도의 뜻이다.

슈만의 템포 지시어는 왜 비웃음을 당했나

한 방송사의 <런닝맨>이란 프로그램을 보면 ‘시간을 지배하는 자’라는 가상의 초능력이 나온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는 실제로 시간을 지배하는 자가 있으니, 바로 ‘음악적 시간’을 지배하는 음악가들이다. 노래방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은 대중음악의 특성상 할 수 없이 타악기가 지배하는 시간에 묶여 여행하지만, 적어도 제대로 된 고전음악 연주자들은 스스로 시간을 만들어가며 여행한다.

이렇듯 음악이란 다른 차원의 시간을 여행하는 예술이기에, 서양 고전음악에서는 그 한정된 시간을 기본적으로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템포 지시어’로 곡의 첫머리에 써 놓았다. 그러다 보니 표제음악이 아닐 경우 이것이 소제목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마치 공자의 논어 중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부분의 이름을 ‘학이’편이라고 부르고, 오페라 중 ‘네순 도르마’(Nessun dorma)라는 가사로 시작하는 아리아의 이름을 ‘네순 도르마’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작곡가 슈만은 이런 소제목을 자신의 피아노 곡 1악장 첫머리에 ‘가능한 한 가장 빠르게(so rasch wie moeglich)’라는 템포 지시어로 적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중간 부분에는 ‘더 빠르게(schneller)’라고 쓰고, 마지막 몇 마디를 남기고서는 심지어 ‘더욱더 빠르게(noch schneller)’라고 써 넣었다. 연주자로부터 ‘아, 어쩌란 말이냐!’라는 푸념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슈만의 이러한 템포 지시는 음악가들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보여주는 전형이 되어 논리학자들에게 매번 놀림을 받았다. 부끄럽게도 서양 음악의 언어를 알기 전까지는 나도 이것이 어떤 전통에서 나온 건지 모르고 술자리의 웃음거리로 삼았었다.

우리나라 음악의 단위는 ‘숨’이지만 서양 음악의 단위는 ‘맥박’이다. 서양 근대음악을 태동시킨 오페라에서, 기승전결 중 ‘승’(承) 부분의 긴장감을 최고조로 올리는 방법은 이 ‘박’을 점점 빠르게 만들어가는 것이었다. ‘매우 발랄하게’란 뜻의 ‘알레그로 아사이’(allegro assai) 부분 다음에 ‘빠르게’라는 뜻의 ‘프레스토’(presto) 부분을 두어 1막을 극적으로 끝내는 이 방법은 서양 음악의 전통이 된다.

벌써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서 ‘발랄하게’라는 말은 연속된 음표들의 뉘앙스이고, ‘빠르게’라는 말은 박 자체의 빠르기이다. 그러므로 음악적 맥락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슈만이 써놓은 템포 지시가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이 ‘발랄하게(allegro)’라는 전통 언어를 ‘빠르게(rasch)’라는 독어로 옮겨서 생기는 오해 때문이다. 이 ‘라슈’(rasch)를 ‘재빠르게’라고만 번역해도 훨씬 이해하기 쉽다. 첫번째의 ‘가능한 한 가장 재빠르게(rasch)’는 음표 사이를 매우 발랄하게(allegro) 연주하라는 표현이자 암묵적 ‘제목’이고, 그다음에 나오는 ‘더 빠르게(schneller)’는 박의 빠름(presto)에 관한 지시인 것이다.

이렇게 기준이 다르다 보니 그 ‘빠르게(presto)’ 부분에서 한 박당 음표의 개수가 줄어들 경우, 실제로는 우리 귀에 음악이 ‘더 느리게’ 들리는 역설도 일어날 수 있다. 박을 젓는 지휘자의 지휘봉 속도만 빨라질 뿐, 음표를 연주하는 연주자들의 손가락 움직임은 더 느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수동 기어 자동차로 예를 든다면, 템포를 ‘분당 똑딱수’로 표시하는 메트로놈은 속도(㎞/h) 계기판이 아니라 분당 회전수(rpm) 계기판인 셈이다. 위 악보는 분당 회전수 3000에서 기어를 4단(1박당 음표 4개)으로 놓고 가다가, 분당 회전수는 4000으로 올리고 기어는 갑자기 2단(1박당 음표 2개)으로 내려서 자동차 속도가 느려진 경우와 비슷하다. 이렇듯 템포와 귀에 들리는 음악의 빠르기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인류의 머리가 굵어지면서, 인문학에서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딱 이 말만 빼놓고’라는 변증법을 알게 되었듯이, 자연과학에서는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다. 빛의 속도만 빼놓고’라는 상대성 이론을 알게 되었다. 시간도 예외가 아니므로 절대적 시간이란 있을 수 없고, 물리적 시간은 ‘자기의 운동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음악가가 나이를 먹을수록 음악성도 더 ‘성숙’해져서 같은 곡을 연주할 때 일부러 젊을 때보다 더 느린 템포로 연주하는 것이라는 믿음은 딜레탕트 음악 애호가의 허망한 착각이다. 음악가도 사람이기에 나이를 먹으면 맥박이 느려지고, 그 박에 따라 시간이 결정되므로 음악도 당연히 느려지는 것일 뿐이다. 그 음악가에게 술을 먹이거나 흥분제를 투여한 후 연주를 시켜보는 간단한 실험만으로도 템포와 음악적 성숙도는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해낼 수 있다.

‘모데라토’를 ‘보통 빠르기’로 
번역해 놓으니 황당한 노릇 
적당한 시간이란 무엇인가 
‘알맞은 시간’은 사라지고 
‘대충 빠르게’만 남아

‘나부코’의 이탈리아어 모르고 
앵무새처럼 부르는 단원들에게 
몇몇 단어 수정 요청했더니 
“관객도 모를텐데 적당히 합시다” 
그 망언 번역은 ‘안단테 모데라토’

빠르기의 기준이 다르다 보니 ‘빠르게(presto)’ 부분에서 한 박당 음표의 개수가 줄어들 경우, 실제로 우리 귀에 음악이 ‘더 느리게’ 들리게 된다.

‘알맞게’는 언제부턴가 ‘대충’이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템포의 변화에 따라 음악적 성숙도를 상상할 만큼, 템포에는 빠르기 외에도 다른 많은 속성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템포라는 음악적 시간은 그 곡의 형식과 내용, 분위기 등 모든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메트로놈에 있는 템포를 나타내는 용어 중 실제로 빠르기를 나타내는 말은 ‘빠르게’라는 뜻의 ‘프레스토’(presto)와 ‘느리게’라는 뜻의 ‘아다지오’(adagio) 단 둘밖에 없다. 나머지 말들은 모두 일반 형용사나 부사이기에 메트로놈에 적힌 순서나 숫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영어처럼 ‘그라베’(grave)는 ‘무겁게’라는 뜻이고, ‘large’와 관련된 ‘라르고’(largo)는 ‘넓게’라는 뜻이며, ‘long’과 관련된 ‘렌토’(lento)는 원래 ‘끈적끈적 늘어지고 처지게’라는 뜻이다. 마치 우리말의 ‘느리다’가 분명 ‘늘이다’와 큰 상관관계가 있는 것과 비슷하다. 또 ‘알레그로’(allegro)는 ‘발랄하게’라는 뜻이고, ‘비바체’(vivace)는 ‘생기있게’ 정도의 뜻이다. 물론 발랄한 말과 생기있는 말 중 어떤 말이 경마에서 더 빠를지 알 방법은 없다.

이 가운데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은 ‘모데라토’(moderato)를 ‘보통 빠르기로’라고 한 번역이다. 세상에, 달팽이와 로켓의 빠르기를 경험하는 사람에게 그냥 ‘보통’ 빠르기란 말처럼 황당한 말이 어디 있을까. 보통 사람의 맥박 속도를 ‘보통 빠르기’라고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음악에 적용하기에는 그 ‘보통’의 편차가 워낙 커서, 대학 시절 ‘보통 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를 살아보고도 아직도 누가 보통 사람인지 모르겠는 나로서는 당최 이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모데라토’는 영어 ‘moderate’에서 알 수 있듯이 빠르기와는 상관없는 그저 ‘적당하게’란 뜻이므로, 음악 용어에서는 일반적으로 다른 말에 붙어 쓰인다. 예컨대 ‘알레그로 모데라토’(allegro moderato)라면 ‘적당히 발랄하게’이니, ‘발랄하되 너무 심하지 않게’란 말이다.

이렇듯 ‘적당히’는 원래 ‘꼭 알맞게, 넘치지 않게’란 뜻이니, 조폭 두목이 “아그들아, 저 손님 ‘적당히’ 주물러서 보내 드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적당히’란 말의 최고로 ‘적당한’ 표현일 게다. 정말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알맞게’ 주물러 드려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적당히’란 말을 ‘대충’이란 뜻으로 쓰며 살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 ‘대충’에는 ‘빠르게’라는 속성이 졸졸 따라다닌다. 밥도 빨리 먹고, 건물도 빨리 짓고, 4대강도 빨리 망치려면 다 대충 해야 한다. 그야말로 ‘보통 빠르기로’라는 이상한 번역처럼 웬만하면 뭐든지 ‘보~통, 빠르게’ 하는 것이다. ‘알맞은 시간(tempo moderato)’은 사라졌다.

오래전 독일에서 오페라 <나부코>를 할 때였다. 합창단만 따로 연습을 하는데, 전세계 어디나 그렇듯 단원 대부분이 이탈리아어를 모르고 그냥 앵무새처럼 부를 뿐이었다. 나는 몇몇 단어의 잘못된 발음을 통일하기 위해서 수정을 요청했다. 그런데 제일 나이 많은 여자 수석단원이 나에게 “마에스트로, 이건 어차피 관객들이 들어도 아무도 몰라요. 그냥 적당히 갑시다”라는 망언을 한 것이다. 나는 아직 그때처럼 흥분해서 유창하게 독일 말을 해본 적이 없다. “병원에 갔는데 당신이 라틴어를 모른다고 의사가 처방전을 아무렇게나 대충 적는다면, 설사 그렇게 처방한 두통약이 우연히 당신의 치질을 낫게 했다고 한들, 그 의사가 제대로 된 사람입니까? 우리가 최선을 다했을 거라 믿고 올 관객들에게 그게 할 소립니까!”

이 ‘적당히 가자’는 망언을 번역하면 우연(!)히도 ‘안단테 모데라토’(andante(영어의 going) moderato)이다. 이토록 차분한 말이 거꾸로 ‘빨리빨리 대충 하고 가는’ 것으로 되어버렸다.

애틋하게, 감미롭게, 격정적으로…

시간을 그저 ‘빠르기’로만 환원하는 사회에 산다. ‘빠르기’라고 번역되는 ‘템포’는 세계에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우리 민족 고유의 언어인 양 느껴지기까지 하는 ‘빨리, 빨리!’라는 말을 외국에서는 ‘tempo, tempo!’로 쓰기도 한다. 엄청나게 많은 속성을 가진 시간을 달랑 ‘빠르기’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구자범

철학 하는 동무들과 미학회를 만들어 아름다운 삶을 고민하며 술 마시던 어린 시절, ‘사람이 완전한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완결된 삶을 살 수는 있지 않을까’라고 궁금해했다. 적어도 나의 여러 모습이 서로 배치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어우러질 수 있는 삶을 고민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당신이 가진 한 재능을 ‘최대화’(maximize)하시오”라며 삶의 시간을 하나에 올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내가 가진 여러 모습을 스스로 판단해서 유기적으로 ‘최적화’(optimize)하겠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서서 “아니 되오. 우리가 보는 당신의 달란트는 이것이니, 반드시 그것을 최대화하시오!”라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애틋하게’, ‘감미롭게’, ‘격정적으로’ 등으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시간을 단순히 ‘빠르기’라는 한 가지 가치로만 환원해 설정한 음악은 무언가 허술하다. 그런데 내 삶에 주어진 시간을 ‘한 가지 능력의 최대화, 아님 말고’라는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에 맡긴다는 것은 얼마나 가련한가. 템포 모데라토! ‘알맞은 시간’을 만들어가고 싶다면 그저 욕심일까.

구자범


http://www.hani.co.kr/arti/SERIES/619/654288.html